발렌시아 예술과학도시는 건물을 하나씩 볼 때보다 물 위에 비친 모습을 함께 볼 때 더 낯설어집니다. 눈을 닮은 극장 옆으로 긴 뼈대가 이어지고, 뒤에는 커다란 오페라하우스가 솟아 있죠. SF 영화 세트 같은 첫인상은 강렬합니다. 그런데 이곳을 오래 보게 만드는 것은 조각 같은 건물 사이를 사람들이 어떻게 걷느냐는 문제입니다. 옛 강바닥에 만들어진 문화 단지를, 물과 산책길을 따라 읽어봅니다.
펠릭스 칸델라
옛 투리아 강바닥
첫 시설: 헤미스페릭
수족관·정원·문화 공간
홍수가 지나간 자리에는 먼저 공원이 생겼습니다
1957년 10월 14일의 큰 홍수 이후 투리아강의 물길은 도시 남쪽으로 옮겨졌습니다. 남겨진 옛 강바닥은 여러 도시계획가와 조경가의 작업을 거쳐 공원으로 바뀌었고, 투리아 정원은 1986년 개장했습니다. 발렌시아 관광청은 이 녹지가 약 9km에 걸쳐 도시를 가로지른다고 안내합니다. 예술과학도시를 이해하려면 이 긴 공원의 역사를 먼저 짚어볼 만합니다. 발렌시아 관광청의 투리아 정원 소개
예술과학도시, 현지 이름으로 Ciutat de les Arts i les Ciències는 옛 하천 부지의 약 2km 구간에 이어지는 문화 단지입니다. 운영자는 칼라트라바의 주요 시설들과 함께, 오세아노그라픽 주요 건물의 지붕을 설계한 펠릭스 칸델라를 명시합니다. 단지 전체를 한 사람의 작품으로 부르면 이 차이가 사라집니다. 운영자의 건축·설계자 안내
저는 이 순서가 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버려진 땅에 천재 건축가가 나타나 도시를 구했다는 이야기보다, 먼저 만들어진 공원에 문화 시설이 차례로 더해졌다는 설명이 장소를 훨씬 잘 보여주거든요. 유명한 흰 건물들의 바깥에도 시민들이 걷고 뛰는 긴 녹지가 이어집니다. 단지의 힘은 그 길과 만날 때 더 커집니다.
헤미스페릭의 눈은 물에 비쳐 완성됩니다
헤미스페릭(Hemisfèric)은 1998년 문을 연 단지의 첫 시설입니다. 칼라트라바가 사람의 눈을 형상화한 영상관으로, 길이 100m가 넘는 타원형 지붕 안에 돔 형태의 상영 공간이 들어갑니다. 운영자는 주변 수공간의 면적을 약 24,000㎡로 안내합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물은 이 건물의 인상을 만드는 큰 부분입니다. 헤미스페릭 공식 건축 설명
설계자는 상영관의 반구형 돔이 수면에 반사되면서 온전한 구처럼 보이는 효과를 설명합니다. 바깥의 금속 부재에는 들어 올릴 수 있는 눈꺼풀 같은 장치도 있습니다. 다만 이 설계 설명을 방문할 때마다 눈을 깜빡이는 공연을 볼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겠죠. 설계자의 눈·반사·가동 장치 설명
이 건물은 반사까지 포함해 형태를 만들었다는 점이 좋습니다. 물이 없다고 상상하면 아래쪽이 잘린 낮은 돔이 남고, 물이 들어오면 윤곽이 다시 이어집니다. 지붕만으로 할 일을 바닥의 풍경과 나눠 가진 셈이죠. 그래서 가까이 다가간 사진보다 물을 넓게 남겨 둔 사진에서 건물의 생각이 더 잘 드러납니다.
그만큼 날씨와 수면 상태에 따라 인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매끈한 반사를 담은 사진 한 장이 이 장소의 모든 표정은 아니겠죠. 주변 건물과 다리, 물 가장자리의 길을 같이 보면 ‘거대한 눈’이라는 비유 뒤에 실제로 드나들고 관리해야 할 공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과학관의 긴 뼈대를 따라가면 평면이 보입니다

무세우 데 레스 시엔시에스(Museu de les Ciències)는 2000년 11월 문을 연 과학관입니다. 칼라트라바의 설명에서는 긴 건물에 같은 단면을 반복하는 구성이 강조됩니다. 내부에서는 가지를 뻗는 나무 같은 콘크리트 구조가 지붕과 외벽의 연결을 받칩니다. 고래의 갈비뼈를 떠올리는 비유가 익숙하지만, 건축을 읽을 때는 ‘같은 구조가 길게 이어진다’는 사실이 더 유용합니다. 과학관 공식 소개 · 설계자의 과학관 구조 설명
사진의 긴 유리 면을 보면 낯선 생물처럼 보이던 외관에도 일정한 간격이 있습니다. 이 반복은 꽤 친절합니다. 복잡한 전체를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해도, 한 칸을 보고 옆 칸으로 눈을 옮기면 되니까요. 끝없이 다른 곡선을 만드는 방식보다 구조의 리듬을 따라가기 쉽습니다.
운영자가 공개한 Planta 1 안내 평면에서도 긴 윤곽 안에 전시 구역이 나뉘고, 가운데와 양 끝 쪽에 계단·엘리베이터가 표시됩니다. 밖에서는 이어지는 하나의 뼈대로 보이지만, 안에서는 층과 구역을 선택해 움직여야 하는 규모입니다. 건물 전체를 걷는 것과 관심 있는 전시를 찾아가는 것은 서로 다른 동선입니다.
큰 건물 사이에서 걷는 속도를 되찾는 곳

움브라클(Umbracle)은 정원 산책로와 전망 공간, 주차 기능을 함께 가진 시설입니다. 단지의 공식 배치도를 보면 과학관 옆으로 긴 정원이 나란히 놓입니다. 물 건너 건물을 바라보는 자리와 식물 사이로 걷는 자리가 가까이 붙어 있는 구성이죠. 움브라클의 용도 · 단지 배치
제 눈에는 이 산책길이 단지의 과장된 규모를 가장 잘 누그러뜨립니다. 흰 아치만 있었다면 거대한 통로처럼 보였을 텐데, 그 아래 식물과 작은 길이 들어가니 사람의 크기를 다시 가늠할 수 있거든요. 사진 속 두 사람을 기준으로 보면 구조가 얼마나 큰지, 그 안의 길은 얼마나 익숙한지 함께 드러납니다.
물과 넓은 빈 공간이 만드는 거리감에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건물을 떨어져 볼 수 있어 실루엣은 선명해지지만, 다음 입구로 가려면 그만큼 걸어야 하죠. 건축 사진에서는 비어 있어 좋은 자리가 보행자에게는 잠시 앉을 곳과 그늘이 필요한 구간일 수 있습니다. 단지를 평가할 때는 유명한 지붕만큼 길의 높이에서 보이는 조건도 봐야겠습니다.
한 장면에 담기지 않는 여러 건물의 도시
예술과학도시는 한 번에 완성된 건물 한 동이 아닙니다. 운영자의 연혁에는 헤미스페릭이 1998년, 과학관과 움브라클이 2000년, 팔라우 데 레스 아르츠가 2005년, 아고라가 2009년에 문을 연 것으로 나옵니다. 개관 연도를 하나로 묶기보다 각 시설이 순서대로 더해졌다고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운영자의 시설별 연혁
팔라우 데 레스 아르츠는 오페라를 중심으로 한 공연장이고, 오세아노그라픽은 해양 생태를 다루는 수족관입니다. 특히 오세아노그라픽 주요 건물의 지붕은 칸델라의 작업이므로, 칼라트라바의 반복되는 리브와 구분해서 볼 만합니다. 같은 단지 안에도 서로 다른 설계자의 생각이 들어 있는 셈입니다. 시설별 역할과 설계자
아고라(Àgora)에는 현재 카이샤포룸 발렌시아가 자리합니다. 칼라트라바가 설계한 기존 건물 안에 Cloud 9의 엔리크 루이스 젤리가 문화 공간을 구성했습니다. 외관을 남겨 두고 내부의 쓰임을 더한 사례라서 흥미롭습니다. 준공 사진만으로 건축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니까요. 카이샤포룸의 건물 소개
발렌시아 예술과학도시는 물에 비친 흰 건물로 시선을 붙잡는 데 탁월합니다. 다만 그 강한 첫인상만 보고 끝내면 아쉽습니다. 과학관의 긴 평면과 움브라클의 작은 산책길, 다른 설계자가 이어받은 아고라까지 같이 볼 때 이곳이 실제로 쓰이는 문화 단지라는 사실이 더 선명해집니다.
아키픽 쇼츠로 발렌시아 예술과학도시 보기
영상 재생 가능 여부는 유튜브의 공개 설정에 따릅니다. 본문은 실제 사진과 설계자·운영자·발렌시아 관광청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자료와 사진 출처
- La Ciutat — Architecture: 시설별 역할, 설계자 구분, 단지의 규모.
- La Ciutat — Hemisfèric: 개관 연도와 건축 구성.
- La Ciutat — Cronología: 시설별 개관 연혁.
- La Ciutat — Museum floor plans: 과학관 공식 층별 안내 평면.
- La Ciutat — 2D map: 단지의 건물 배치 안내도.
- Santiago Calatrava — Ciudad de las Artes y de las Ciencias: 과학관 구조와 헤미스페릭의 반사·가동 장치.
- Visit Valencia — Turia Garden: 홍수 이후 물길 변경과 공원 조성.
- CaixaForum València — El edificio: 아고라 내부 문화 공간과 설계자.
사진의 촬영자·원본·라이선스는 각 이미지 아래에 표시했습니다. 자료 확인: 2026년 10월 3일.